[제17회 콜로퀴움] 바울의 아담 해석: 죄의 기원에 대한 신약의 목소리

 

바울의 아담 해석

: 죄의 기원에 대한 신약의 목소리

 

아담의 역사성 논쟁에서 빠짐없이 제기되는 질문은 바로 신약성서에서는 아담을 역사적인 인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죄가 들어왔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온인류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만약 아담의 역사성이 부인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도 무너질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논쟁점은 과역 바울이 이해한 아담의 죄는 무엇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과연 무엇이었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이번 콜로퀴움에서는 신약성서가 말하는 죄의 기원과 기독교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 온라인 등록도 가능합니다. 직접 콜로퀴움 현장에 오실 수 없는 분들, 지방이나 해외에 계신 분들은 생방송으로 콜로퀴움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수강신청을 하실 때, 온라인 수강을 선택해 주시면 강연 전에 미리 강연을 보실 수 있는 주소를 알려드립니다.)

 

[수강신청 바로가기]

 

일시: 2019년 11월 11일(월) 저녁 7:30-9:30

장소: 더처치 비전센터 5층 채플실 (관악구 쑥고개로 122, 서울대입구역 5분 거리)

* 오시는 길 안내: https://bit.ly/2EnfTvU
* 강의 장소에는 별도의 주차공간이 없습니다. 오실 때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등록비: 현장 수강, 온라인 수강: 5,000원 (청소년은 무료)
* 과신대 정회원은 현장 수강, 온라인 수강 모두 무료 

 

강연 순서

1부 강연(7:30-8:20) "바울의 아담 해석" (권연경 교수)

     휴식(8:20-8:30)  
2부 대담(8:30-9:30) 패널: 권연경 교수, 우종학 교수

 

 

강사 소개

 

권연경 교수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풀러 신학교(M.Div.)와 예일 대학교 신학부(S.T.M.)를 거쳐 런던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이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 : 「로마서 산책」(복있는사람), 「행위 없는 구원」(SFC출판부), 「네가 읽는 것을 깨닫느뇨」(SFC출판부),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선교회),「일상,부활을 살다」(복있는사람), 「로마서 13장 다시읽기」(뉴스앤조이),「갈라디아서 산책」(복있는 사람), 「위선」(IVP), 공저 :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새물결플러스), 공역 : 「IVP 성경신학사전」(IVP), 「예수의 정치학」(IVP), 역서 : 「기독교와 문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 「고린도전서」(SFC출판부)

 

 

패널 소개

 

우종학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 거대 블랙홀과 은하 진화를 연구하는 천문학자. 연세대학교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산타바버라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교와 UCLA에서 연구원으로 일했고, 미 항공우주국(NASA) 허블 펠로십(Hubble Fellowship), 한국천문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천체물리학 저널〉 등 국제 학술지에 약 100여 편의 논문을 게재했고, 연구 이외에도 과학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강연과 저술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며 연구하고 교육하는 단체인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블랙홀 교향곡》을 비롯하여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대화》 (공저) 《기원》 (공저)이 있고, 《현대과학과 기독교의 논쟁》 《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 《우주의 본질》 (공역)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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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영 박사 인터뷰] 2. 하나님의 자기제한과 창조

 

2019 과학신학 심포지엄에서 "과학이 본 자연, 신학이 말하는 자연"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시는 강태영 박사님을 만나고 왔습니다. 강태영 박사님과의 인터뷰를 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일시: 2019.9.28 토요일 오후

인터뷰이: 강태영 박사

인터뷰어: 최경환 실장

 

 

Q: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창조를 하나님의 필연성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훨씬 더 창조 세계의 보존과 책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몸으로 생각하니깐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필연으로서의 창조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창조의 가치를 높일 수는 있겠지만, 사랑은 필연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깐요. 사랑은 자발성이지 않습니까. 여성신학이나 과정신학의 한계는 그 지점인 것 같습니다. 환경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창조 이야기가 끌려들어 올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카오스든 무로부터의 창조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평행하는 영원한 존재는 없다'는 것을 말하니깐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은 상대화됩니다. 이스라엘 주변에는 대부분 다신론적인 국가들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Q: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부가 세상이다"라는 말은 어떨까요? 범재신론이라든가 몰트만은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지 않나요? 

 

A: 네, 그런 설명은 유대인 사상가 이삭 루리아(Isaac Luria)의 '침춤'(Zimzum)이라는 사상에서 나온 겁니다. 원래는 이 사상이 성전신학에서 나왔습니다. 신학의 이론만이 아니라 신학의 생성과정을 알아야 하는데요. 모든 신학에는 이력이 있습니다. 성전신학에서는 '무한하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이 지은 공간에 들어와 계실까? 하나님이 성전에 계신다면, 밖에는 안 계실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이죠. 어찌 보면 장난스러운 질문일 텐데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죠. 솔로몬 성전은 하나님께서 다윗 시대에 허락하지 않고 솔로몬 시대에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이 이 성전에 정말 임재해 계셔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가 거기서 기도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만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여기 어떻게 들어와 계신다는 말이냐?'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자기의 옷자락을 성전에 걸쳐 놓은 것이 아니고, 즉 성전은 하나님의 부분 집합이 아니고, 하나님이 여기에 임재해 주셔야 하는데, 그 방법은 하나님이 자신을 제한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본 것이죠. 자신을 수축하셔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셔서 이곳에서 우리는 만나주시는 방법 밖에 없다고 봤습니다. 우리가 보통 왕을 알현하다고 하잖아요. 성전에 들어가면 지성소 안에 법궤가 있지 않습니까. 그 법궤는 원래 왕이 앉는 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법궤 모퉁이에 스랍들이 시중드는 모양이 있습니다. 스랍이 내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거죠. 하나님이 법궤라는 의자에 앉아계시고, 제사장을 통해서 재물을 받으시고, 백성을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 재단은 사실 식탁이었습니다. 번제나 속죄제 빼고는 재물을 다 나눠 먹었죠. 그래서 여기에서의 희생 개념은 죽음이 아니고 식탁의 개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이 작은 공간에서 임재함으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스스로 자기를 제한해서 여기 임재해 계시는 거죠. 하나님의 무소부재와 하나님의 임재를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이스라엘이 이동하면 회막도 같이 이동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임재하셔야 하기 때문에 백성이 이동하면 하나님도 이동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이미지이지만 분명한 것은 신이라고 하는 관념적인 이미지가 있고 우리가 그분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죠.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방식이 바로 자기제한인 것이죠. 여기서 '케노시스'도 나오는 거죠. 

 

'그렇다면 바벨론 포로기는 어떻게 설명할 거냐? 성전이 없어져 버렸는데.' 물을 수 있죠. 그런데 상관이 없는 게, 원래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데,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주려고 성전에 임재하신 것이기 때문에 성전이 있건 없건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시죠. 포로기 문서들을 보면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끌려가고 있다는 표현이 나와요.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죠. 

 

이삭 루리아는 이런 생각에 상상을 더해서 창조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실 때, 공간이 어디 있었겠느냐. 하나님이 무소부재하기 때문에 공간이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 안에 공간을 만들어 버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부가 되어버리죠. 그러면 세계도 신성을 지녀야 하죠. 그래서 루리아는 어떤 상상을 하냐면, 하나님이 자신을 수축하셔서 공간을 빈 공간을 만드셨다는 거죠. 하나님 없는 공간을. 즉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 없는 공간이죠. 왜냐하면 이 공간이 하나님 밖에 있으면, 그 자체가 또 하나님처럼 영원해야 하기 때문이죠. 하나님 안에 있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거두어들인 거죠. 상당히 변증법적인 논리죠. 거기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거죠. 그래서 영원하신 분이었는데 하나님 없는 이 공간에서는 창조와 더불어 시간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영원한 시간이죠. 종말은 반대입니다. 종말은 자기를 제한했던 하나님이 그것을 풀어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 안으로 완전히 받아들여지니깐 피조물이 신성에 참여하게 되는 거죠. 시간은 영원으로 바뀌죠. 이것이 이삭 루리아의 생각이고 이것을 몰트만이 받아들입니다. 

 

 

몰트만 신학의 큰 장점은 교리에 대한 새로운 통찰입니다. 몰트만은 유대인 사상가와 대화를 하면서 이런 신화적 틀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깐 신약에 오기 전부터 케노시스가 있었다는 거죠.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는데, 그 이유는 사랑 때문이라는 거죠.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 하나님은 자유롭기 때문에 스스로를 제한할 수 있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신 거죠. 

 

그래서 카오스로부터의 창조든 무로부터의 창조든 성서가 이 둘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둘 다 중요합니다. 이것을 양자택일 하라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겁니다. 이 둘을 모두 이야기해야 균형 잡힌 창조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저는 에코 페미니즘에 대해서 다른 대안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지혜 문학에 보면,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지혜가 숨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연이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심어주신 지혜이기 때문이죠. 그게 발전해서 로고스가 만물의 씨앗이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셨고, 하나님은 이 만물 안에 로고스를 심어놓으셨죠. 지혜들이 천지 만물에 숨어 있어서 자기가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을 탐구할 수 있도록 자연을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 지혜를 하나님이 숨겨 놓으셨는데, 이 지혜에 완전하게 이르는 길을 인간은 모른다는 거죠.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거죠. 그냥 탐구만 하면 과학이지만, 성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죠. 이 세상의 작은 미물이라도 그 속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가 숨겨져 있는 거죠. 과학은 그것을 탐구하는 거죠. 

 

천지만물을 다스리라고 할 때, 베스터만은 그것을 제한적인 지배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가갈 수 있지만, 그것은 내 소유가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알기 때문이죠. 우리가 탐구해서 그것을 파악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만물 안에 숨겨져 있는 지혜가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거기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죠. 그래서 저는 과학을 통해 놀라운 발견을 하고 통찰을 얻는 것은 지혜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표현이 방정식으로 되었든 신앙의 언어로 되었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일어난 진실은 하나입니다. 

 

 

Q: 선생님, 진짜 책을 한 권 쓰셔야 할 거 같아요. 너무 많이 배웠습니다. 이런 내용을 글로 읽고 싶은데요.^^ 마지막 질문인데요. 종말에 대한 것입니다. 요즘 기후위기에 대한 논의가 많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뭐, 저희가 답을 알고 있으면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건데, 우리는 늘 모색해 보는 거죠.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죠.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한 것을 많이 오해했는데, 베이컨 식으로 자연을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것은 이 명령을 잘못 이해한 것이죠. 반대로 이것을 비판하면서 과대하고 비판한 것도 있습니다.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성서적 전통은 아닙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모든 피조물이 공동 피조물이라면, 내가 이웃에서 행한 것은 곧 나에게 행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은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상대화시킬 수 있으니깐요.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중요하죠.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죠. 그런데 우리는 보통 관계를 늘 인격적인 관계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생물과의 관계도 중요하죠. 인간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에 대한 계명이 철저한 이유는 이웃에게 행한 것은 곧 나에게 행한 것이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이런 것은 관계 자체를 붕괴시키는 거죠. 이건 공동체 전체를 붕괴시키는 행위죠. 파멸이죠. 이것이 혼돈의 힘이죠. 그래서 정의가 중요하죠. 지금 이웃과의 관계라고 할 때, 윤리적으로는 내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지라도, 생태 문제로 들어가면 그것을 넘어서는 이웃을 만나게 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그동안 자연이라는 이웃에게 테러를 행한 거죠. 욕망추구라는 이유 때문에 말이죠. 인간은 그동안 좀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고, 좀 더 많은 소비를 해야 했죠. 그 결과 자연을 마구 쓸 수 있는 재료로 생각한 것이죠. 그런데 만약 우리가 사람에게 이렇게 했다면 상대방이 저항을 했겠죠. 그러면 어느 선에서는 멈출 수 있었겠죠. 그런데 말 못 하는 자연이니깐, 자연은 침묵하고 있으니깐, 자연을 재료로 삼은 것이죠. 그런데 입을 갖지 못한 이웃에 대해서도 우리가 존중해줘야죠. 더불어 살아가려면 공간을 내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아기가 태어나면 물리적으로도 공간이 필요하고, 가족 속에서도 특별한 배려의 공간이 필요하죠.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모든 것, 인간이 아닌 다른 이웃에게도 공간을 내어주어야죠. 그런데 우리는 계속 공간을 점령하기만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가해를 했고 이웃의 공간을 박탈했기 때문에 이제는 회복해야죠.

 

이제는 이웃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자기를 제한하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죠. 우리가 행동을 달리 하면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상할지 모르지만 지구 온난화 문제는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대신 살아주지는 못하기 때문이죠. 지구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이죠. 

 

이런 문제는 이론 몇 개 내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죠. 실천을 달리 할수 밖에 없습니다. 삶의 태도,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욕망의 문제라 할 수 있죠.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죠. 이 문제는 누가 대신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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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제국의 프로테스탄트] 2. "이산화탄소" 도대체 누구냐, 넌?

  • 지구온난화가 우리나라에서 이슈가 되고 저도 처음 접했을때가 생각이 나네요. 그게 벌써 20년도 더 된 기억인데 그 이후 우리가 얼마만큼 노력하고 인지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요즘 작은 실천이지만 플라스틱 줄이기 운동의 하니인 텀블러나 개인컵 사용은 많이 보급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으며 계속 관심을 가지겠습니다. 좋은글 응원합니다~

    김현호 2019.10.28 23:05
    • 댓글 감사합니다. 저희 과신대에서도 소소하지만 의미있는 실천을 하나씩 만들어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산화탄소" 도대체 누구냐, 넌?

 

김진수 (에딘버러대학교 지구과학부 박사 후 연구원)

 

 

이산화탄소.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많이들 들어보셨겠지만, 막상 어떠한 원리로 어떻게 지구온난화가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번 순서에서는 이산화탄소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탐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0.04% 이산화탄소

 

이산화탄소(CO2)는 용어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탄소 원자(C) 하나에 산소 원자 2개 (O2)가 결합한 화학물질입니다. 전 지구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 평균 농도는 약 400ppm인데, ppm(parts per million)은 전체 양 중 100만 분의 몇을 차지하는가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위입니다. 즉, 100만 분의 400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에게 익숙한 %로 표현하자면 0.04%입니다. 전체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0.04%. 매우 작은 양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양을 무게로 환산해보면 약 850기가톤 (기가톤 = 10억 톤)이나 됩니다.

 

 

비닐하우스와 이불의 원리

 

0.04%의 이산화탄소가 도대체 공기 중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이산화탄소는 대표적인 온실가스 (greenhouse gas)라고 알려졌습니다. 온실 또는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비닐하우스에서는 별다른 장치 없이 투명한 비닐 막 하나로 내부 온도를 효과적으로 올려서 각종 채소를 재배할 수 있습니다. 비닐은 태양 빛(가시광선)을 투과시켜 내부까지 잘 들어오게 해 주지만, 실온에서 모든 물건이 내는 적외선 영역에서는 불투명해서 나가는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잡아주게 됩니다. 즉 들어오는 에너지에 비해 나가는 에너지는 적어서 내부 온도를 높이게 해줍니다. 온실가스는 이러한 원리로 지구 대류권 대기의 온도를 높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어도 이불에 들어가서 잠시 있다 보면 점점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불 자체가 따뜻해서가 아니라 (이불 자체가 처음부터 온도가 높았던 것이 아니라) 이불을 덮고 있는 우리의 체온이 이불 안에 갇혀있는 공기를 데우는 것입니다. 이불이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열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기 때문에 더 따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실가스도 이불의 원리와 같습니다. 대류권에서 만들어지는 적외선이 곧장 우주로 나간다면 온실효과가 없겠지만, 나가던 적외선이 온실가스와 반응하여 일부가 우주로 가지 못하고 대류권을 데우는 효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증가하는 이산화탄소

 

18세기 산업혁명 이전에는 이산화탄소 농도가 280ppm이었는데, 현재는 400ppm이니까 약 43% 늘어났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매년 2ppm (43억 톤)씩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뚜렷한 추세는 인류활동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화석연료(석유, 석탄) 사용과 토지사용 변화(숲을 농업 또는 다른 용도로 변환)가 대표적인 원인입니다.

 

 

위의 그래프는 지난 80만 년의 이산화탄소 기록입니다. 남극에 매년 눈이 쌓일 때 그 당시의 공기를 머금고 쌓이게 되는데, 80만 년 동안 눈이 쌓인 곳을 찾아서 얼음 기둥을 시추하여 분석한 결과입니다. 80만 년 동안 가장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았던 시기의 기록은 300ppm 정도인데, 현재는 400ppm이 넘었습니다. 물론 자연적인 변동으로 적게는 200ppm, 많게는 300ppm 구간을 오르락내리락하였지만, 최근 관측된 400ppm이라는 숫자는 자연적인 변동으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해 보입니다. 즉, 인류 활동에 의한 이산화탄소 방출 때문에 최근 급격한 이산화탄소 농도 상승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1958년부터 최근까지 정확하게 관측한 이산화탄소 그래프입니다. 단 한 번도 감소한 적 없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시면, 월간 이산화탄소 농도를 나타내는 빨간 점들이 지그재그 모양으로 변동하는 것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매년 5월경에 가장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고 9월경에 가장 낮은 계절적 변동이 매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북반구에 자리하고 있는 숲들이 많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배출하는 양의 일부는 흡수하고 있지만, 이산화탄소 농도의 뚜렷한 추세를 억제할 정도는 아니므로 여전히 매년 이산화탄소 농도는 기록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류가 화석연료 사용과 토지사용 변화로 방출하고 있는 이산화탄소는 최근 10년 기준 매년 5ppm 이상입니다. 나머지 3ppm 정도는 해양과 육상의 식생(주로 숲)이 흡수하여 대기 중에는 약 2ppm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해양과 식생이 매년 3ppm 정도를 흡수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더 극심한 지구온난화에 시달렸을지도 모릅니다.

 

기후 파업 등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인류는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전기 사용 및 난방 (25%), 토지사용 변화 (24%), 산업 (21%), 교통 (14%), 건축 (6%) 등에서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 칼을 대어 빨리 줄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산화탄소 배출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미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편의를 포기하고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또는 경제적인 손해를 보면서까지 줄여야 한다는 데에 사람들이 동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는 느리기만 합니다.

 

계속 증가할 이산화탄소

 

특별한 제제가 없는 한 이산화탄소 배출은 계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총 이산화탄소 배출량에서 전 세계 7위, 인구당 배출량은 3위를 차지하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개인이 텀블러를 사용하고 노력을 할 수 있겠지만, 사회 전반적인 구조적 변화 없이는 당장에 이산화탄소 배출을 혁신적으로 줄이기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활동 때문에 43% 늘어난 이산화탄소와 그로 인한 지구온난화로 지구의 기후가 변해왔지만 앞으로가 더 큰 문제입니다. 매년 2ppm씩 쌓이고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언제까지나 해양과 식생이 3ppm씩 흡수하지 못할 것이라는 연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해양과 식생이 어느 정도 저장고 역할을 하고 있지만, 기후변화 때문에 이산화탄소 흡수 기능을 상실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과학자들은 양의 되먹임 (피드백) 작용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는데, <지구온난화 – 흡수 능력 상실 –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더 쌓임 – 더 쌓인 이산화탄소가 추가적인 지구온난화 야기> 이러한 형태로 결과가 다시 원인에 영향을 미쳐서 더 급진적인 지구온난화가 야기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산화탄소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편의를 제공합니다.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 있습니다. 현재의 편의는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기후변화나 수십 년 뒤에 일어날 지구온난화에 대한 위험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현재의 편의를 위해 고의적으로 망각하는 것입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오늘날 예수님께 드린다면 어떤 대답을 듣게 될지 상상해봅니다. 자기 이기심과 욕망을 뛰어넘는 신앙과 이 세상 질서와는 매우 다른 하나님 나라를 살아낼 것이 요구될 때, 지구온난화를 줄이기 위한 우리의 고민도 더욱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욕적으로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편의가 가져올 대가를 인지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 대해서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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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주간을 돌아보며

 

글_ 차정호 (대구대학교 과학교육부, 기초과정II 5기 수료자)

 

 

1. 지난 5주간을 돌아보며

 

달력을 열어 놓고 지난 일정을 돌아보니 과신대 기초과정 II를 시작한 게 8월의 마지막 주였다. 중간에 두 차례의 휴식을 포함하면 8주, 거의 두 달간의 긴 여정을 달려왔는데 어느덧 마무리할 시점에 와있다. 광고지를 보면서 등록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때로 돌아가 나의 상태를 생각해 본다.

 

남아공에 있을 때 온라인으로 기초과정 I을 수강했었다. 아니 그 이전부터 창조론(설)에 대한 많은 책을 읽으면서 꾸준하게 공부해왔는데 아쉬움이 많았다. 영상을 보든 책을 읽든 정보를 습득하면서 지식은 많아지는데 뭔가 머릿속으로는 잘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랄까. 정리를 도와줄 촉매가 필요했다. 우리 지역에는 책모임이 없으므로 내 유일한 대안은 기초과정 세미나 참석뿐이었다. 마침 2학기에는 월요일에 강의가 없었고, 기차 시간을 잘 따져보니 세미나 마치고 돌아오는 것까지는 가능하겠다 싶어 등록을 단행했다.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참가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접했던 1주 차 시간을 통해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각계각층에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았다. 특히 나보다 더 먼 경산에서 매주 이 세미나에 참석하는 분들로 인해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신학과 과학의 관계를 갈등, 독립, 대화, 통합으로 나누어 고찰했던 2주차 세미나는 내용이 다소 어렵게 다가오긴 하였으나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분석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3주 차 세미나에서는 성경에 창세기뿐 아니라 시편이나 예언서를 포함한 구약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 언급이 다양하게 언급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를 통해 그간 창조론에 관한 관심이 창세기 1, 2장에 편협되게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성경을 일관되게 해석할 때 젊은 지구론의 바탕이 되는 문자적 해석이 입지가 좁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새로운 무신론의 핵심 주장을 종교의 폭력성, 비합리성, 그리고 비과학성 측면에서 살펴봤던 4주 차 세미나에서는 무신론의 주장에 대한 나의 관점을 정립할 수 있어 특히 의미가 있었다. 한때 관심을 가지고 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샀지만 괜한 두려움에 책장에 꽂아만 두었는데 이제는 담담하게 읽을 용기가 생겼다.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이 이런 상황을 빗대는 게 아닐까 싶다.

 

5주차 세미나에서는 기존의 창조론 논의의 판을 뒤엎고자 ‘창조설’과 ‘창조론’이란 용어를 새롭게 정의하고 창조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논의했다. 창조과학 지지자나 과신대나 모두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아니냐, 정작 중요한 것은 창조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의 문제가 아니냐는 관점이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비록 창조과학 지지자들의 정치적 선동에 가까운 전파 활동이 여전히 이 판의 물을 흐리고 있지만, 창조론의 중요한 본질을 짚고 가는 것은 나름의 의미는 있어 보인다.

 

 

2. 과학의 도전과 나와 교회의 대응

 

이렇게 5주 간의 지적인 여정을 통해 내가 정리할 수 있는 과학의 도전은 1)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며 오히려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무신론의 공격, 2) 성경과 과학의 관계를 오해해서 둘을 일치시키기 위해 문자적인 성경 해석을 교조적으로 전파하는 창조과학 지지자들의 열광적인 활동, 그리고 3) 생명 공학 및 인공지능으로 대표할 수 있는 첨단 과학기술의 도전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1) 무신론의 공격에 대한 대응

 

무신론의 교회에 대한 공격은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으로 포장되어 전파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방법론적 무신론을 채택하는 과학 연구와 학교 과학교육을 통해 과대 포장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과학 연구가 가지는 한계나 과학적 연구 방법의 본질 등을 제대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과학’ 혹은 ‘통합과학’으로 배우는 교과서에는 과학의 본성(nature of science)에 대해 가르치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들이 학교 수업을 통해 제대로 가르쳐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냥 한번 훑어보고 넘어가고 있다면, 이 부분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실태를 밝히면서 상황을 개선해가는 일은 내 전문성의 영역에서 해볼 만한 과제라 하겠다.

 

한편 공교육에서 과학의 한계에 대해 가르치는 부분은 아무래도 미온적일 수밖에 없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종종 관련 내용은 무시되기 때문이다. 또한 수업이 이뤄진다 해도 강조되는 내용이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과학의 한계와 무신론의 공격에 대한 논점을 주일학교나 특별 세미나 등을 통해서 이해시키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신 없는 사람들>의 내용을 주일학교 아이들의 눈높이 맞춰 설명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어쩌면 그 책 내용으로 만화책을 출판해도 좋겠다.

 

2) 창조과학에 대한 대응

 

한때 창조과학 지지자로서 대학에서 교양 강의도 개설했던 내게는 10여 년 전의 내 행동에 대해 빚진 심정을 가지고 있다. 창조과학으로부터 돌아 선 이후 지금까지 지적인 순례를 지속해 오면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자료도 차근차근 모으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대학교에서 15주 동안 3학점으로 가르칠 수 있는 강의를 만들고 싶다. 일방적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수업이 아닌 같이 생각하고 토론하는 수업이 되었으면 한다. 60-70명이 수강하는 강의에서 어떻게 그런 활동을 할 수 있을지도 함께 고민할 지점이다.

 

교회 차원에서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불과 며칠 전에도 시내 어떤 교회에서 열리는 창조과학 세미나 광고를 볼 정도로 창조과학 지지자들의 열심은 전방위적이다.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성도들과의 관계가 걱정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반대를 표하기보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표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다. 그러나 만약 창조과학의 내용과 성경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성도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가려운 곳을 긁어줘야 한다. 특별 강연이나 독서모임을 통해 성도들의 지적인 수준을 높이는 일에 교회가 힘쓸 필요가 있다. 성경해석에 관한 것도 좋고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것도 좋다. 성도들이 성경 해석에 조금의 유연성만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문자적 해석에 대한 집착에서 한 발만 물러설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창조과학의 입지가 좁아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한편으로는 창조과학을 포용하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최근 몇 년동안 창조과학과 과신대 사이에 극명한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김정형 교수님의 주장처럼 둘 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아니던가. 창조과학도 하나님의 창조라는 큰 우산 아래 함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대립각을 세우기 보다는 그쪽 진영의 열정적인 에너지를 선한 방향으로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창조과학과 과신대의 대결 구도를 무신론과 창조론의 대결 구도로 프레임을 전환하려는 노력을 통해 창조에 대한 풍성한 논의가 진행되면 좋겠다.

 

3) 첨단 과학기술의 도전

 

당장이라도 실험실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 수 있을 수준으로 생명 과학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과학의 최전선에서 어떤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는 대중들은 어쩌면 곧 과학이 조물주의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자부심과 두려움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긴 후로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크다. 심지어 설교조차 인공지능이 하게될 수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이처럼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첨간 과학기술은 끊임없이 교회에 새로운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이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어쩌면 첨단기술의 발전을 교회와 신학이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 임파서블일 것이다. 그렇다고 대책없이 막연한 두려움만 키워갈 것인가. 무시 혹은 무관심은 교회를 우물 안 개구리 상태로 고립시킬 수 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이 과신대가 기여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과학자와 신학자 사이의 대화를 통해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 내용이 가지는 신학적 함의를 논의하고, 이를 대중적인 언어로 풀어낼 사명이 과신대에 있다고 본다.

 

 

3. 마치며

 

지나간 세미나 자료들을 넘겨 보며 그새 공부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때로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라 입력조차 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매 시간마다 한두 가지 관점은 내 생각을 선명하게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처음 제출했던 과제에서 나의 목표로 설정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난 두 달간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나의 지적인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 가운데 대학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강의를 열어 오랜 마음의 빚을 갚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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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도전에 대한 나와 교회의 대응

 

글_ 이현식 (육군 군목, 기초과정II 5기 수료자)

 

 

지난 5주 동안과학과 신학의 대화와 관련된 여러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토론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참 감사하다. 먼저 이런 귀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과신대에 깊이 감사드린다. 새로운 안목을 열어주시고 기존의 시야를 넓고 풍성하게 해주신 교수님들과 모든 참가자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세미나를 마치면서 과학시대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정리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도 참 의미가 있다. 나는 목회자로서 아래와 같은 대응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1. 성도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도록 가르치겠다. 설교와 성경공부 외에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하는지에 대한 친절한 안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 과학주의의 영향으로 성경을 과학책처럼 읽으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초등학생들도 성경은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아 믿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이다. 지성인조차도 성경을 대할 때는 모든 지성의 활동을 접고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으려 한다. 성경이 어떤 책인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관점과 태도를 가져야할 지 가르치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 <성경을 읽는 법>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과정을 열거나 도서를 읽도록 할 것이다.


2. 창조신앙에 대해 더 자주 설교해야겠다. 지난 몇 년간 내 설교를 돌아보니 창조신앙에 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음을 발견하였다. 창세기 뿐 아니라 신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창조 이야기를 토대로 성경적인 창조신앙에 대해서 설교할 필요를 깨달았다. 특히 창조신앙이 단순히 기원 논쟁이나 창조의 과정에 대한 논의를 넘어 더 포괄적이면서도 핵심적인 하나님 고백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신앙고백임을 드러내는 설교를 통해서 창조신앙이 오늘 자신의 삶의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고백되도록 해야겠다.


3. 교회 내에서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탐구의 기회를 확대해야겠다. 특히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교사들과 부모들이 이런 기회를 갖도록 교사세미나, 부모 세미나 등에 반드시 이런 과정을 포함시키고자 한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는 어린이 부서 교사들이 매주 우종학 교수님의 <과학시대의 도전과 응답>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창조과학적 접근에만 익숙했던 몇몇 교사들이 처음에는 저항이 있었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새로운 안목으로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보기 시작한다는 보고를 받고 있다. 역시 교육이 중요하다.


4. 다음세대를 위한 과학과 신앙 캠프를 열어야겠다. 지난여름 방학에 학생부 담당 전도사와 중고등학생 중 희망자 몇 명이 과신대 과학캠프에 다녀왔다. 참석자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 더 많은 다음 세대가 이런 캠프에 참석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고 기회를 마련해주어야겠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무엇보다 목회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성도들의 영적성장 및 건강한 신앙 형성에 목회자의 역할이 상당히 큰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어느 단체나 리더 만큼만 성장한다는 이야기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겠다.

 

과학주의가 점점 더 큰 소리를 내며 진리를 독점하는 것 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맹목적이고 문자주의적인 근본주의 신앙을 토대로 한 교조주의적 외침이 마치 기독교의 유일한 대변자인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건강한 성경적 관점과 과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 신앙이 자리매김하도록 교회 내에서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뿐 아니라 그런 동역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과학시대에 이 세상 한가운데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 이미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사역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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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는 실험노트와 같다.

[부천/인천 북클럽 10월 모임]

 

 

일시: 2019.10.15
장소: 서울신학대학교 박영식 교수 연구실
교재: 존 폴킹혼, <과학으로 신학하기> (모시는사람들)

 

2019년 하반기에 부천 북클럽에서는 존 폴킹혼의 책을 읽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읽을 책은 <과학으로 신학하기>라는 책입니다. 지난 모임에서는 1장 "맥락신학"을 읽고 이야기했습니다.

 

  1. 폴킹혼은 "성서는 이러한 계시를 수반하는 토대적인 만남들에 대한 설명이 기록된 실험노트"라고 말합니다. "계시 자체는 명제적이라기보다 실험적"이라고 말합니다. 계시가 명제가 아니라 실험노트와 같다는 말에 대해서 논의를 길게 했습니다. (39쪽)

  2. 19세기 오므리 무어는 다윈의 진화론이 오히려 신의 섭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진화론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신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창조자로 남아 있지 않고 피조물들이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자연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로 결정하였다"고 생각한 거죠. (42쪽)

  3. 폴킹혼은 판넨베르크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판넨베르크는 "과거와 현재보다 미래가 우선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53쪽), 폴킹혼은 이런 입장을 납득하기 어려웠나 봅니다.

  4. 그러면서 폴킹혼은 아서 피코크의 비유를 빌려, 우주의 역사는 "창조자와 피조물들이 함께 연주하는 멋진 즉흥연주 푸가로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54쪽)

  5.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기적을 물리 세계 내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난 심포지엄에서 발표하셨던 로버트 러셀 교수님의 의견도 첨언해서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부천 북클럽 모임은 언제나 먹을 것이 넘칩니다. 박영식 교수님께서 늘 간식을 풍성하게 챙겨주시네요~^^

관심 있는 분들은 누구든지 환영입니다.

 

 

  • 다음 모임 시간: 10월 29일(화) 저녁 7시 박영식 교수님 연구실

  • 다음에 나눌 내용: 2장 담론, 3장 시간과 공간, 4장 인격과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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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Q] 7. 인류원리: 의미를 추구하는 일은 무의미한가?

 

[과신Q] 7. 인류원리: 의미를 추구하는 일은 무의미한가?

 

우종학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얼마 전에 과학자들과 대담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우주와 생명, 그리고 지성의 기원을 논하는 자리였는데,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에 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인류원리는 우주의 역사를 보면 마치 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한 특별한 조건을 갖추도록 우주가 정교하게 조율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는 특성들을 해석하는 하나의 관점입니다.

 

강연을 듣던 대중들의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인류원리가 인류의 존재에 관해 어떤 특별한 의미를 준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고, 반면 인류원리는 의미 없는 자의적 해석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의 반응도 흥미롭습니다. 인류원리는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해석일 뿐만 아니라 일고의 가치가 없는 짜증 나는 주장이라는 약간 과격해 보이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일부 과학자들이 인류원리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지적설계론자들의 주장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류원리를 지적설계자(intelligent designer, 신을 지칭합니다)가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탐지해 낸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지적설계론자들은 신의 창조활동을 과학으로 탐지 가능하고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는 무리한 주장 때문에 신학적인 면과 과학적인 면, 둘 다 심각한 오류를 범합니다. 신의 창조 행위를 과학이 탐지하는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오류가 첫 번째이고, 과학이 밝힌 인과적 관계는 하나의 해석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과학을 변증에 사용하는 오류가 두 번째입니다. 이미 많은 비판이 있기 때문에 더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무신론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9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일부 과학자들은 반대 방향에서 지적설계와 같은 오류를 범합니다. 신의 행위는 과학으로 탐구 가능한데 과학적 증거는 신을 명백히 보여주지 않으니, 신의 창조는 반증되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방식입니다. 결론은 반대지만 같은 오류입니다. 신의 창조 행위를 과학으로 탐지 가능하다는 전제부터 문제가 심각한 것이지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류원리는 과학이 아닙니다. 인류가 존재하기에 적합한 매우 특별한 조건을 우주가 갖추고 있다는 것은 과학적 사실입니다. 우주 초기의 물리적 조건이 조금만 바뀌었더라면,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탄소나 산소 같은 원자들은 우주에 생성되지 않고 우주는 (우리가 아는 생화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보면)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로 그 역사가 흘러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특별해 보이는, 정교하게 조율된 듯한 우주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과학을 넘어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과학이 발견한 사실들을 종합하고 이해하려는 지성적 작업의 결과가 인류원리입니다. 지적설계론자들과 다르게, 인류원리를 처음 제시한 그 어느 과학자도 인류원리를 과학이라고 부르거나 과학의 영역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존재할 특별한 조건을 우주가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것은 과학적 결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형이상학적 해석은 무의미할까요? 과학을 넘어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은 쓸데없는 일일까요? 형이상학은 그저 주관적이고 확실하지 않은 분야에 불과하니, 과학적 설명에만 만족하고 거기서 멈춰야 할까요?

 

물론 그렇게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흔히 과학 아래 다른 학문들을 통합시키려고 하는 용감한 주장이 그렇습니다. 글쎄요. 그런 방식의 통섭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이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제한되어 있고 과학적으로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들도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일인가? 불의 앞에서 희생할 수 있을까? 내 인생에서 추구할 가치는 무엇인가? 이런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과학이 명료한 답을 줄 것으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과학은 그저 자연세계의 작동원리와 인과관계를 설명해 줄 뿐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과학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우주의 원리를 하나하나 파악해 가려는 지적 노력이지만 우주를 밝히는 일 그 자체가 우리가 과학을 하는 목적의 전부는 아닙니다. 과학은 인간이 하는 지적 노력이며 과학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과학이 밝힌 결과에 대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묻고 해석하는 일은 인류가 추구해야 할 당연한 지성적 작업입니다.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혹은 이번에 취업시험에 떨어졌다면 혹은 아이가 아프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가 매일 겪는 사건은 과학적 설명이 가능합니다. 사고가 났다면 과속이 원인이었는지 혹은 부주의가 원인이었는지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습니다. 시험에 떨어졌다면 준비를 게을리했는지 혹은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묻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 아프면 면역력이 약해진 건지 다른 원인이 있는지 당연히 묻고 파악하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일은 우리 사고의 일차적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인과관계가 밝혀지고 과학적 설명이 제시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지적 작업이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발생한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게 됩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삶을 돌아보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묻게 됩니다. 교통사고의 어떤 인과관계로 발생했겠만 우리는 그 사건의 의미를 묻습니다. 시험에 떨어지거나 누가 아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건이 그날 거기서 발생한 과학적 설명을 넘어서 우리는 이 사건이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묻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시공간의 인과관계에 따라 의미 없이 움직이는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그 일이 발생한 과정을 과학이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일이 발생한 의미를 묻습니다. 의미를 찾고 부여하는 일이 바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지성적 작업입니다.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문학은 우주의 변화과정을 밝혀주고 우주론은 초기 우주의 물리적 조건을 알려줍니다. 과학으로 파악되는 그 우주에서 생명이 탄생했고 지성이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성은 수천 년의 지성사를 거치며 과학을 발전시켰고 우주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우리는 어떻게 우리 인류가 우주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과학은 우주가 인류를 출현시키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우주의 역사가 흘러왔다고 알려줍니다. 우리는 그 과학적 설명을 넘어 그렇다면 이 우주에서 인류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습니다. 그런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과학이 발견한 내용의 의미를 찾고 해석하는 일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지적 작업입니다.

 

종종 과학자들 중에는 과학을 모든 학문의 제왕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학이 보여준 눈부신 성공은 당연히 인정하고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더더욱 과학에 힘을 써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학을 넘어서 과학이 제시하는 결과를 종합하고 이해하려는 작업은 훨씬 포괄적이고 형이상학적입니다. 오히려 과학적 설명을 넘어 그 내용이 우리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묻고 해석하는 지적 사유가 훨씬 더 중요한 작업일 수 있습니다.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인류원리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과학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해석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보는 견해는 과학주의라고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는 과학의 결과들을 놓고 깊이 사유하며 이것이 인류에게 주는 의미들을 고찰해야 하고 어느 방향으로 우리의 역사를 밀고 갈 것인지 고민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류는 지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조금 더 힘을 보태주세요.

과신대 후원에 조금 더 힘을 보태주세요.

 

지난 3년간 '과학과 신학의 대화'는 한국교회의 시대적 요청과 과학과 관련된 기독교 학문의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해 왔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분의 관심과 사랑 속에 이만큼 성장했습니다. 작년에는 종로 낙원상가로 사무국을 옮겨 편안하게 업무를 볼 수 있는 사무공간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아직 전임 간사를 채용하고, 중요한 사업을 진행하기에는 재정이 너무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앞으로 과신대는 과학과 신학에 대한 좋은 글들을 모아 '과신대뷰'를 발행하고, 교회학교를 위한 '창조신앙 캠프'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청소년들을 위한 교재를 집필하고, 연구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등 다양한 사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사역을 안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사무국 간사를 고정적으로 채용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월 100여만 원 정도의 재정이 추가로 더 필요한 상황입니다. 

 

과신대는 정회원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비영리단체입니다. 과신대를 지지하는 분들의 후원과 참여는 한국교회에 지성의 제자도를 확산시키고 올바른 신앙과 건강한 과학 지식을 전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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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과신대가 다양한 사역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과신대를 지켜봐주시고 후원해주신 정회원들의 후원 덕분이었습니다. 이제 과신대가 2020년을 준비하며 더 열심히 한국교회를 향해 대안적인 목소리를 내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정회원 여러분께서는 후원 증액으로 힘을 보태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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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물리학자가 본 창조 (feat. 신학자가 본 빅뱅)

 

2019 과신대 심포지움을 다녀와서

 

글_심기주

 

 

9월 30일 하루종일 과학신학 심포지움이 있었지만, 나는 일이 끝나고 특별강연인 세션4부터 참여할 수 있었다. 세션4의 강연자는 버클리연합 신학대학원(GTU & CTNS)의 로버트 러셀(Robert J. Russell) 교수님이셨다. 통역은 이형주 박사님이 담당해주셨다. 위트 넘치는 교수님의 강연과 또 통역도 잘 해주신 박사님 덕에 재밌게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기원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의 견해들을 ppt로 잘 분류하여 소개해주셔서 정리가 쉬웠다. 흥미로웠던 건 자연에서의 신의 개입에 대한 보수적 견해인 "기적"으로 개입하신다는 견해와 진보적 견해인 "신의 개입은 단지 자연 현상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잘 보완한 "NIODA"라는 교수님의 견해였다.

 

“Non-interventionist objective divine action”

 

즉, 비간섭적 객관적 신적 행위의 약어인 NIODA양자역학적 개념을 도입했다. 그래서 이 개념을 통해 신적 행위를 존재론적 비결정론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을 단지 이신론적인 신으로 보지도 않고(진보적 견해 보완), 그렇다고 하나님이 '기적'만을 통해서 이 세상에 개입한다고 보지도 않는 것이다(보수적 견해 보완).

 

 

우주론과 종말론의 주제에 대해서는, 과학의 예측과 신학에서의 종말론이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말씀하셨는데 이것도 주목할 만했다. NIODA를 통해 유신 진화로 하나님의 개입을 설명할 수 있다면, 과연 자연 세계에서의 고통과 하나님은 어떻게 관계하실 것인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 함께 고통받으신다는 것에는 과학과의 마찰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세상 구속에서의 "새 창조"를 말할 때, 종말론은 과학으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이제껏 나는 인간 생존을 기준으로 볼 때, 기술의 극대화로 인해 인간 스스로 새 창조에 이른다거나, 인간이 자멸하거나, 혹은 지구의 서식 수명이 다할 때를 종말로 보는 견해 등을 주로 들어봤다. 또 우주 전체를 기준으로 볼 때,  열린 우주, 평평한 우주, 닫힌 우주의 세 가지 모형으로 우주의 미래를 전망하는 것을 들어봤다.

 

이런 전망과는 달리 교수님은 '하나님은 과학의 예측을 깨고 새로운 방식과 질서로 하나님의 창조를 새창조로 변혁시킬 것을 말하신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 지점은 언제일 것인가? 과학이 전망하는 종말이 오기 직전인가? 그보다 훨씬 전인가? 그렇다면 과학의 전망에 대해 어디까지, 언제까지를 신뢰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이때까지 과학적 규칙성을 계속 유지하시기로 선택하셨고, 그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셨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통해 종말 때의 "새로운 질서"를 미리 보여주셨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새로운 질서를 우리가 "예측"할 수나 있을까? 논의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그 힌트는 새 창조가 현 창조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것과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있을 수도 있다. 

 

이 다음의 논의는 어떻게 해야할까? 교수님은 ctns 홈페이지를 알려주시며 그 여정에 함께 하기를 초청하시며 강연을 마무리하셨다. 

 


마지막 세션은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모여 오늘의 세션 전체를 종합하고 피드백하는 자리였다. 사회는 서울신대의 박영식 교수님이 맡아주셨다.

 

인상깊었던 것은 윤철호 교수님의 말씀이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개입을 말하려면 초자연적인 것을 가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양자역학적 우연으로도 하나님의 개입의 설명이 가능하다."

 

허견 교수님은 "뇌과학에서는 의식 부분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혼과 맞닿아 있으며 이 의식 부분은 모두 생물학적으로 환원할 수가 없다."고 하셨다.

 

또 최승언 교수님의 말씀도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이 자꾸 과학하고 신학하는 교수들은 기도 안하는 줄 아는데 우리도 기도합니다."

 

오늘 심포지움 장소를 제공해주신 강남새사람교회의 전기철 목사님의 질문이 와닿았다. 과학신학적 주제를 교회 안에서 얘기하기에는 그 갭이 너무 커서 얘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고, 오히려 교인들은 삶에서 맞닿뜨리는 고통과 문제를 다루는 것을 거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역자라고 소개한 또다른 청중은 "요즘 아이들은 기성 세대의 '권위있는 하나님'보다 '소통하는 하나님'을 더 좋아한다"면서 "이런 과학신학적 얘기를 꺼내고 나누는 것이 생각보다 자연스럽고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 우종학 교수님은 "교회 차원에서의 젊은 세대의 교육이 이 신학과 목회의 갭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고 하셨다.

 

목회와 신학과의 갭, 그리고 현장에서의 고민, 과학신학의 현시대의 과제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 기회를 마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posted by 과신대 기자단

창조과학은 이신론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 음.. 제 생각에 너무 멀리가신 것 같습니다만..
    창조과학회에서도 해가 멈춘 것 뒤로간 것, 바다가 잠잠케된것, 홍해가 갈라진 것,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자연에 변화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을 알고 계실겁니다(참고로 저는 창조과학회와 관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만드시고 운영하시는 것은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알고 믿고있는 내용일겁니다 ^^; 이런 전지전능하신 분이 우리를 한 점으로 창조 하실 수도 있으셨다면 우리를 지금의 모습으로도 창조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창조고학회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에는 혹 하는 마음이 들엇지만 이내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구요 하나님을 과학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1리터 비이커로 바닷물을 측정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다고 생각했거든요 ^^& 1리터의 비이커는 과학입니다 그 비이커로 하나님을... ㅎㅎ
    왜 창조과학회를 비판적으로 생각하시는지... 물론 창조과학회가 비과학적인 부분으로 이야기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세상사람들이 보면 같은편끼리 열심히 싸우는 것처럼 보일까봐 조심스럽습니다...ㅠㅠ 하나님이 주신 비이커로 열심히 바닷울을 해이면서 하나님의 광대하심, 위대하심, 전지전능하심을 느끼는 것은 정말 기쁜일이지만 그 비이커로 너네가 맞는이 내가 맞는니 하는 것은 좀.....^^;
    짧은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

    여호수아유석 2019.10.29 09:25

 

창조과학은 이신론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글_임택규

 

제가 현재 근무하는 직장은 전력회사입니다. 캘리포니아에는 3개의 전력회사가 있는데, 제가 일하는 회사는 캘리포니아 중부에서 남부에 이르는 130,000 평방킬로미터의 광할한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토의 넓이가 100,210 평방킬로미터이니까, 대한민국 국토보다 약간 더 넓은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캘리포니아주에 2개의 원자력 발전소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샌디에고라는 도시의 바로 북쪽인 샌 오노프레라는 곳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는 몇 년 전에 폐쇄를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가동되고 있는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단 하나의 원전인 디아블로 캐년 발전소는 주정부 원자력규제위원회의 원전 가동 허가가 만료되는 2025년까지 완전히 폐쇄될 예정입니다.

 

강화된 환경규제에 맞춰서 태평양 해안가에 있는 많은 화력발전소들도 차례로 폐쇄되고 있고 그로 인한 전력 생산의 감소는 풍력이나 태양에너지같은 무공해 재생에너지를 통한 발전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저는 새로 개발되는 태양력 발전소에 송전시설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주와 네바다주의 경계에 있는 모하비 사막은120,000 평방킬로미터를 넘어서는 광활한 면적에, 여름 최고 기온이 섭씨 54도에 달하며, 연간강수량은 250 밀리미터 미만입니다.  우리나라의 연평균 강수량이 약 1,250 밀리미터 정도이므로, 이렇듯 건조한 기후와 엄청난 일조량을 가지고 있는 모하비 사막은 정말 태양력 발전에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래 사진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태양력 발전소가 잘 찍혀 있습니다. 

 

 

사진 윗쪽 부분에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세 군데의 발전소는 태양광 발전소로 오해하기 쉽지만 태양열을 사용하는 발전소입니다. 거울이 반사시킨 태양빛을 집광타워에서 모아서 그 열로 물을 끓여서 터빈을 돌려서 전기를 생산합니다. 사진 아랫 부분 중앙에 크게 보이는 발전소는 햇빛을 잘 흡수하는 검은색을 띄기 때문에 태양열 발전소로 오해하기 쉬우나 저런 형태의 검은색 패널을 가진 발전소가 태양광을 이용하는 발전소입니다. 태양에서 복사된 빛 입자가 패널 표면에 닿으면 그 에너지를 흡수한 전자가 방출되는 현상을 이용해서 전력을 생산하는 형식입니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발표한 광전현상을 이용한 발전 형태입니다. 

  

이러한 발전소들은 당연히 송전시설을 필요로 합니다. 수십 마일 때로는 수백 마일에 달하는 송전시설 및 변전시설들 없으면 당연히 생산한 전력을 소비자들에게 공급할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요. 어쨌든지 이러한 발전소, 송전시설, 혹은 변전시설이 완공이 되면 그때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떠한 시설물(Asset)이 완공된다는 것은 그 시점부터 그 시설물은 공학적인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경제학적으로는 그 시점부터 재화를 창줄할 수 있다는 점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어떤 시설물의 건설을 완성한다는 것, 프로젝트의 목적을 달성을 달성한다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준공과 더불어 나타나는 피할 수 없는 부정적인 현상도 있습니다. 바로 감가상각(Depreciation)이 시작된다는 것 입니다. 완공된 시설물들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점 노후가 진행되고 잔존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보관하고 보수하며, 때로는 시설물의 이 부분 저 부분을 신품으로 교체해주지 않는다면 곧 그 시설물은 기능을 제대로 발현할 수가 없게 되버립니다.

 

 

근대과학이 태동하면서 이신론(Deism)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싹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이신론적 신관은 과학적 결정론에 힘입어서 태동했습니다. 인류가 자연이 운행되는 법칙을 전부 파악할 수 있다면 인류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결정론이 발생했던 것 입니다. 이러한 결정론 속에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개입을 통해 이루어지는 역사는 더 이상 요청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기적들은 우리의 정확한 계산을 틀리게 하는 귀찮은 변수에 불과하게 된 것이지요. 

 

자연을 기계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기계의 구동원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기계가 미래의 어떤 시점에 어떻게 작동할 지를 충분히 계산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 기계가 우리 계산과 다르게 작동을 한다면 그러한 오작동은 자칫하면 대형 사고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 설치하셨던 이 법적인 질서에 의해서 정교하게 작동하는 자연이라는 기계가 갑자기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확한 계산에 의한 예측을 빗나가게해서 끔찍한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오작동의 변수일 뿐입니다. 이러듯 이신론적인 세계관 속에서는 하나님의 기적 혹은 능동적인 개입마저도 거부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신론은 근대적 의미에서 무신론의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결국 이러한 이신론이 현대의 과학적 무신론으로까지 연결되어 있지요. 이러한 이신론 혹은 무신론적 세계관은 현장에서 구조물을 축조하고 그것을 통해서 편익과 재화를 창출하는 회사에 근무하는 엔지니어인 저에게는 굉장히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준공된 후에도 적절한 관리를 통해서만 시설물의 가치와 성능이 유지된다는 점을 매일매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회에서 진화론이 이신론적이라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저에겐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주장이지요. 진화론은 물론 과학이론에 불과하지만 저는 그 속에 무한한 신적 개입(Divine Intervention)의 여지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속에 개입하시고 피조물들을 보살피시며 사랑으로 다스리셔서 풍성케 하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섭리를 우리가 통찰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하나님께서 6천여년 전, 6일 창조 이후에 자연계에 아무런 개입이 없으셔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제겐 이신론적으로 느껴집니다. 만약 창조 이후 하나님께서 자신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이 자연에 아무런 개입이 없으셨다면 이 자연은 과연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네 진입로를 재포장하고, 골목길에 설치된 가로등을 재정비하는 구청 토목과 직원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posted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