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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신뷰/기자단 칼럼

빈, 그것은 아낭케 Ananke

by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2. 4. 11.

빈, 그것은 아낭케 Ananke

감각인 Homo sensibilis - 빈손의 소리를 들었다

 

 

빈 손을 내밀었다 허공에.

 

비어있는 손바닥 위에 햇살이 머문다. 따뜻하고 투명한 질감은 뽀송하다. 뒤집은 손등 위에서 혈관들을 비집고 싹이 나올지도 모르겠어서 그대로 숨죽인다. 해를 쫓는 향일성인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햇살을 손에 쥐었다 펼쳤다 하면서 사유의 길로 빠진다.

 

 

악수를 한 적이 있었다.

 

서로 만져야 사는 부류인 인간은 '나는 만진다. 고로 존재한다.'는 콩다악의 명제에 긍정했던 시대에. 그러니까 손이 닿는 것을 머뭇거려 하는 시대에 살기 이전에. 그 시대를 살았던 감각인은 촉각이 모든 감각의 완성이라고 여겨서 만지는 것이 곧 아는 것이었고 그것은 곧 명명 불가능한 유적인 진리였다. 태어나고 사라지고 미끄러지며 멀어지기도 하는 진리 같은 것들. 그것은 라캉의 말과 바디유의 말을 가늠해 보건대 감각인인 내가 촉각으로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촉각은 항시 내게 사건이다.

 

 

사물은 마치 블랙박스 같아서

 

제 각각의 요소들이 그것들이 품고 있는 것들을 끄집어낸다.이를테면 기분, 날씨, 정치, 언어, 물리학, 생물학, 감각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투시하여 사물을 열어젖힌다. 라투르는 이들을 행위자라 부르고 이들의 연결을 군주로 등극시키지만 나는 촉각을 통해 사물을 투시하며 그것들에 이미지를 입히는 구성자다.

 

 

내 손은

 

그대의 손을 만지면서 거칠지만 부지런하고 다정한 손이라고 느낀다. 낱알 같은 자음과 모음을 버무려 알맹이 그득한 의미로 만들어 내는 그 재주꾼 손은 따뜻하기까지 하여 나를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우주로 가고 싶게 한다. 햇살대신 손이라면 그래서 2022년 2월 22일 2시 22분 22초에 그대라는 물성은 어떤 촉각으로 나를 사로잡아서 그 느낌에 나를 충성하게 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몽상의 시간으로 빠져들기도 전에 단호하고 담담한 물리적 사실의 행위자인 원자가 쪽지를 건네준다.'손은 원자로 되어있다.'가 쪽지 속에서 냉소적이고 투명하게 웃고 있다.

 

 

원자의 구조를 세상에 드러낸 근대과학이 우리에게 보낸 전갈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물리적인 세계는 허상이라고 적혀있다. 단단한 책상을 만지고 맨질거리는 네모난 책을 손으로 만지고 있는데도 실제로는 그것들이 거의 텅 빈 공간이라는 것이다. 물질을 이루는 것은 원자이므로 물질세계의 사방을 둘러보아도 원자로 이루어진 것들은 모두 텅 빈 공간과 공간의 겹침일 뿐이다.

 

우린 그 공간에서 빈 공간인 손으로 그대의 허공 같은 손을 포갤뿐이다. 그렇다면 사물들 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나무 속으로 의자 속으로 책 속으로 네 속으로 들어가 앉아 허허롭고 광활한 빈 대지 위에서 그것들과 섞여 있어도 되지 않을까? 마치 내가 그들의 일부인 것처럼. 또 바람과 하늘과 새들과 악기들이 내게 들어와 내 빈터를 맘껏 놀이터 삼아도 되지 않을까?

 

내게, 네게, 우리에게 널디 너른 허공인 그곳을 내어주어서 내가 담기고 네가 담기는 것이라면 우리는 꽉 채워지지 않을까? 어디에 구멍이 뚫린 것도 아닌데 계속해서 바람이 일고 허전해 하는 것은 처음부터 너들의 자리여서 너들로 채워져야 하고 메꿔져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불가능이다.

 

쉼없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지만, 선뜻 내민 손이 아직 보이지 않고 메아리처럼만 있는 까닭이다. 결국에까지 허전해져 버리는 것, 그것은 데미우르고스가 물질의 형상을 빚을 때부터 지니고 있던 '어쩔 수 없음' 인 아낭케 즉, 우리의 존재론적 운명임을 원자가 말해준다. 밀어내고 튕겨내는 그리하여 너를 나로 채울 수 없는 운명을. 빈손인 바람의 옷을 입고서.

 

나는 햇살 속에서 빈손의 소리를 들었다.

그럼에도 네게 손 내미는 위반을 하면서.

 


 

글 | 백우인

감신대 종교철학과 박사 수료.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 튜터. 신학 공부하면서 과학 에세이와 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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